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우파 투쟁 (문단 편집) === 반우파 투쟁의 확대 === 현재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비림비공운동]] 등을 "극좌적 태도에 빠진" 마오쩌둥과 [[4인방]] 등 극좌분자들이 잘못 처결한 실책이라고 인정했지만, 반우파 투쟁 자체는 중공의 잘못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반우파 투쟁의 후기 단계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장"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많은 지역에서 우파 기준을 단순화하고 우익 분자의 비율을 하위 단위에 할당해 결과적으로 별 관련이 없는 이들까지 우파로 간주되어 온갖 탄압을 받았다. 한편, 당초 소수민족을 존중하기로 정했던 중국공산당은 1957년 청도회의에서 정책 방향을 급격히 바꾸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에서 민족공화국 건립이나 연방제 실시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이 회의에서는 소수민족 인사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소수민족의 열악한 경제사정을 개선하고 그들의 대우를 정당하게 해주기로 합의하긴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와 같은 약속은 공수표였음이 드러났다. 1957년 10월 15일, 중공 중앙은 소수민족 중에 지방민족주의 사상이 새롭게 조장되고 있다며 지방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요 내용으로 삼아 사회주의교육 운동과 정풍 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성패는 소수민족 지구에서의 당의 지도력에 달려있다며 지역 간부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1957년 11월 19~20일 베이징에서 열린 민족사무위원회는 소수민족지구와 소수민족 성원들에게 사회주의교육운동 전개와 관련된 문제를논의했다.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왕펑은 소수민족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실현한 후 지방민족주의가 새롭게 조장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진행할것을 강조했다. 1957년 12월 16일 중공 신장위구르자치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도 소수민족 중의 지방민족주의 문제를 중점으로 논의했다. 자치구 당위서기 사이프틴은 민족문에제 있어 독립 혹은 공화국 건립을 요구한 것, 민족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한 것, 한족의 도움을 반대한 것 등이 모두 반당, 반사회주의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에 관한 기본 원칙은 소수민족의 특징에 따라 바꿀 수 없으며, 만약 이 기본선을 넘는 사람은 모두 수정주의자로 간주할 거라고 경고했다. 1958년 4월 28일, 중공 신장위구르자치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 인민위원회 문화청장 즈야 쟈마티, 민정청장 이브라인 툴디, 압둘 라만 아샤 등으로 구성된 소위 "지방민족주의 반당 소집단"이 폭로되었다. 이들 반당 소집단은 조국 통일을 분열시키고 민족단결을 파괴했으며,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당의 지도를 반대하고 인민민주전정을 약화시킨 반당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당적은 박탈되었고 당 내외 모든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조직을 결성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뒤이어 6월에 개최된 확대회의에서는 위의 세사람 외에 우루무치 시장 아샤드, 자치구 부청장 아블리즈 카리 등이 추가되어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에게 소수민족의 권리 개선 및 생활여건 개선을 요구했던 인사들 상당수가 '지방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혀 탄압받았고 자연히 이들이 제기됐던 문제제기는 흐지부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